나의 독서론


필자에게 독서란 새로운 지식을 챙기는 즐거움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늘 잠재의식에서 크게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는 '주눅'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집 이층은 필자의 놀이터이자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거기에 꽤나 큰 서재가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모아놓으신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필자는 어린시절 그렇게 사회성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1960년대말이나 70년대 초반에 게임기가 있었겠나 아니면 컴퓨터가 있었겠나? 만화방이나 무협지 정도가 다였겠지만 필자는 거기에 별로 취미를 붙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집에 혼자있을 때면, 특히나 겨울철 집에 있는 꿀단지(진짜 꿀단지가 집에 있었다. 거의 작은 고추장독 크기의 항아리에 늘 꿀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를 가랭이 사이에 끼고 집에 있는 책을 읽고는 했던 것 같다. 특히나 외할아버지가 편찬에 참여해서 삼촌집과 우리집 서재에 모두 꽃혀있던 13권짜리 백과사전은 필자의 단골 독서거리였다. 기억에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 이미 초등학교 2학년때 영국이 펼친 3C 정책에 대해 인상깊은 기억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필자의 식구들은 독서狂이다. 평소 일요일이면 필자의 집은 끼니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막강산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필두로 필자의 누나까지 모두 책만 붙잡고 있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어머니집을 방문해 보니 어머니 잠자리 머리맡에 책이 필자 키 높이로 쌓여있더라.

사실 어린 나이에 이런 집안 분위기가 건강한 분위기일 수도 있겠지만, 별로 문재가 없거나 공부에 취미가 없는 어린 소년에게는 주눅이 드는 분위기이다. 어찌되었건 그렇게 필자의 어린 시절은 흘러갔고 고3을 지나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학과를 배정받은 것이 2학년때였는데 2학년 여름방학때 생태학 실험실에 나가서 실험을 도와(?)드렸다. 말이 좋아 도와드리는거지 페트리디시나 닦고 선배들 실험하는 분위기나 익혔던 것같다. 그때 4학년 형이 한 사람있었는데... 그 형과 3학년 형, 누나 몇명이 친해져서 함께 설악산도 놀러가고 그랬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때 그 형이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말로만 들어보던 평창동 도둑놈 부자촌에 가볼 기회가 생긴거다. 정말 으리으리한 집들이 산비탈에 빽빽이 있는데.. 아무튼 그 형 집에 도착했다. 들어서니 거실 벽면 두군데가 온통 책이다. 대략 3층 높이의 벽면에 직각으로 2면이 온통 원서(-.-;;)더라. 그 선배의 부친께서는 서울대 교수셨다.

한동안 까맞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sonnet님께서 올리신 포스팅(장서가의 조건)을 읽는 순간 그때 기억이 떠 올랐다. 아무튼.. 그때 책이 벽면 끝까지 있는 걸 보며 그 선배와 나눴던 얘기가 생각이 난다. "형... 정말 책 많다" "응~~ 이사오면서 2/3는 버리고 온거야" "(쿵~~~~ emoticon)"

그리곤 또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석사 신입생이 되었다. 선배따라 논문 찾는 법을 익힌다고 도서관을 따라갔다. 그전까지 수도없이 도서관을 들락거렸지만, 생전 처음보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에 가니 필자의 주요 연구 테마와 관련된 신간 논문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키워드만 넣으면 그만이지만, 그 당시만해도 꿈도 꿀수 없던 시절이라...

Current Content 라는 작은 하얀책에서 필자의 연구 키워드를 알파벳으로 찾은 다음에 해당 논문들을 저널 서고에 가서 찾는 것이었다. 작은 쪽지에 저널 이름과 해당 연도, 볼륨, 페이지를 적어 저널 서고에 들어섰다. (!!!)

예전 어린 시절 2층 거실에 있던 서재나, 대학교 2학년에 방문해 본 선배 부친의 서재와 또 얘기가 다른 세계가 있더라. 어느 한구석에서 누워 잠들면 찾기도 힘들만큼 커다란 공간에 서가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거기에 한뺨 두께로 장정된 논문집들이 끝도 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때 그 책들이 주는 부담감이 얼마나 크던지 도서관 밖으로 걸어나와 한참 담배를 피며 앞서간 선배 과학자들의 연구와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연구의 무게감에 한동안 넋이 빠져있던 기억이 난다.

뭐 꼭 필자의 연구분야뿐만은 아니고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작년 11월 페리스코프의 홈지기님께서 올려주셨던 글(시장이냐 정부냐 그것이 문제일까) 이 하나 있다. 글 내용보다 말미에 언급하신 경제계산논쟁(Economic calculation problem)을 잠깐 보며 수십년에 걸쳐 세계적인 대가들이 벌인 그런 논쟁을 이제는 한가하게 인터넷 클릭 몇번으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행세할 수는 없겠다는 그런 숙연함같은 거 말이다. 필자의 부족한 글솜씨보다는 페리스코프 홈지기님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기로 한다.

"홈지기는 꽤나 늦게 이들의 글들을 읽어보고서, 수십 년의 세월이 무색해질 정도로 시장과 정부의 강점과 약점을 헤아린 깊은 통찰에 고개를 절로 떨구고는 했다. 어설프게 읊어대고 으스대던 시장과 정부의 문제점들이 실은 그들이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며 펼쳐낸 것임을 발견했을 때의 화끈거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서로가 글을 쓸 때 다소 귀찮더라도 독자들에게 이런 다양한 참고할 거리를 함께 던져주는 노력이 병행되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고견을 경청하며 선학들의 지혜에 머리도 숙여갈 수 있는 논의가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대충 필자가 풀어낼 이야기들은 다 풀어낸 것 같다.

필자에게 독서란 [겸손으로의 길]이다.

선학들이 남기신 지혜를 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머리 숙임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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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독서론 릴레이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이제 제 앞에 서 계신 분들의 명단입니다.

#1

Inuit (독서란 자가교육이다) buckshot (독서는 월아이다) 고무풍선기린 (독서란 소통이다) mahabanya (독서란 변화다) 어찌할가 (독서란 습관이다) 김젼 (독서란 심심풀이 호두다) 엘군 (독서란 삶의 기반이다) (독서란 지식이다) Oddlyenough (독서란 가랑비입니다.) 마키디어 (독서란 연애다.) 파아랑 (독서란 새벽 3시다.) 송동현 (독서란 수집이다)


#2

Inuit (독서란 자가교육이다) buckshot (독서는 월아이다) 고무풍선기린 (독서란 소통이다) mahabanya (독서란 변화다) 어찌할가 (독서란 습관이다) 김젼 (독서란 심심풀이 호두다) 엘군 (독서란 삶의 기반이다) (독서란 지식이다) okgosu (독서란 지식섭식이다. ) hyomini (독서란 현실 도피다. ) Raylene (독서란 머리/마음용 화장품이다.) 하느니삽형 (독서란 운동이다) foog (독서란 삶이다) 토양이 (독서란 모르겠다.) 파아랑 (독서란 새벽 3시다.) 송동현 (독서란 수집이다)



우선 제게 바톤을 넘겨주신 송동현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릴레이를 전해드리고 싶은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디 청을 거절치 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학생수학도님과 추유호님입니다.

두분 모두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체계적인 자료 축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실제로 그 일들을 꾸준히 해오고 계신 우리나라 블로그스피어에서 참 보기 드문 분들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rss 정기구독도 하실 것을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