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상은 이런 저런 중요 이슈로 들끓고 있는데 한가하게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되었건 한 명의 논객이 써 올린 블로그글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다양한 논객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이 제 눈길을 끕니다. 아마 이런 과정이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집단 지성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번 이 과정들을 정리도 하고 제 의견도 밝혀 볼까 합니다. (참.. 이 논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처음 발단은 2008-07-19에 ‘20th소년소녀님’이 올리신 “박정희와 경제성장( http://win0419.egloos.com/1983864 )”이란 글입니다. 박통 하나를 옹호하기 위해 나머지 국민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이었죠.

이 글을 보시고 sonnet님께서 2008-07-20에 “단순논리의 약점( http://sonnet.egloos.com/3831779 )”이란 글로 반박을 하셨습니다. 경제성장에 지도자와 국민들이 ‘어느 정도씩’ 기여하는 것이 당연하고, 중요한 점은 그 기여 정도를 ‘제대로’ 살펴 보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습니다. 사족으로 박통이 가졌던 권력의 크기에 대해 언급하셨고 맨 마지막 문장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 얘기를 끼워주셨죠.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역대 지도자를 이중 잣대로 평가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저 역시 예전에 서프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2007-07-24에 쓴 “당파성에 관하여( http://crete.pe.kr/170 )”라는 글이죠. 저는 sonnet님 글의 핵심을 제 글과 마찬가지로 이중 잣대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봤기 때문에 당시에는 긍정적인 평가였습니다.

이쯤에서 대충 정리가 되나 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foog님께서 sonnet님 글의 마지막 문장을 문제 삼아 “사실관계 확인의 중요성( http://www.foog.com/468)”이란 새로운 포스팅을 해 주셨습니다. 즉 sonnet님의 글 말미에 등장하는 “큰 권력을 갖고서도 어리석게 굴면 경제정책에 실패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이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라는 문장을 문제 삼으셨죠. 즉 북한 경제에 대한 김일성의 경제적 공과를 또 다른 단순논리로 폄하하는 것을 경계한 글입니다.

참 재미있죠. 저 역시 sonnet님의 “단순논리의 약점”이란 글에 전반적인 동감을 표시하지만, 정작 sonnet님의 글에서는 sonnet님 본인이 20th소년소녀님의 글에서 지적한 ‘단순논리’를 그대로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foog님의 이 지적에 sonnet님은 ‘어린양’님의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http://panzerbear.blogspot.com/2007/10/5060.html )”이란 글로 반론을 하셨습니다. 즉 sonnet님은 어린양님이 주장하셨던 『50~60년대 북한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결국 중소의 경제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린양님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중국과 소련이 북한과 다른 동유럽 위성국들에 제공한 경제 원조의 분량도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고, 남한이 같은 기간 미국으로부터 수령한 경제 원조 량과도 비교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냥 ‘50-60년대에 중소의 원조가 많아서 북한이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두드려졌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별개 아니다.’ 라고 해석할 빌미를 준다면 sonnet님이 20th소년소녀님에게 지적하신 “민중주의적 해석”을 거의 100% 동일한 형태로 sonnet님의 주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foog님의 지적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이유는 저 역시 북한 사회가 50~60년에 가졌던 역동적인 사회상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죠.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서프에 예전에 썼던 글들이 있습니다. 2008-02-11 “북한의 전쟁고아 정책( http://crete.pe.kr/361#0 )”이란 글입니다. 남한이 거의 대부분의 전쟁고아들을 해외에 입양조치 한데 비해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형제국들에 잠시 양육을 맡겼다가 다시 본국으로 모두 불러 들인 역사적 사실을 지적한 글이죠.

물론 저는 foog님이 지적하신 북한의 50~60년대의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좀 씁쓸한 입장입니다. 그 이유는 50~60년대의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1958년 남한 정부에 남한 어부들이 북한 어로구역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남북한 어업관계자 회의 제안을 마지막으로 평화적인 대남 접근 자세를 포기합니다. 하지만 참 인상적이죠? 적어도 1958년에는 현재 남한이 북한에 제안하고 있는 남북한 공동어로 구역 설정 같은 제안을 북한이 남한에 했다는 사실이 말이죠. 아무튼 그 후 북한은 자신의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는데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예전에 제가 서프에 썼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NLL양보가 나라 팔아 먹는 일이라고?( http://crete.pe.kr/187#0 )”

각설하고 foog님께서 지적하신 sonnet님 본인의 글에 담겨 있는 “민중주의적 해석”에 대한 지적과 sonnet님의 반론은 여기서 중단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sonnet님이 foog님의 지적에 대해 어린양님의 글 하나만으로 반론을 내세우기에는 좀 부족한 대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sonnet님은 이후 “로버트 포겔의 철도 논쟁, 그리고( http://sonnet.egloos.com/3833344 )”라는 장문의 포스팅을 새로 해 주셨습니다. 제가 외람되게 sonnet님의 이 글 중에 핵심을 꼽아 본다면, “박통의 업적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박통을 제외한 차선의 선택(가령 김대중이나, 김종필 같은 동시대의 다른 정치인)을 능가하는 공헌을 박통이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이렇게 타임머신을 타고 날라가서 박통을 제거(?)하지 않고야, sonnet님께서 예로 들어 주신 철도와 운하 같은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겠죠. 그런데 사실 이 비슷한 해석의 예가 2005년도 서프글 중에 있었습니다. ‘연금술사’라는 분께서 남기신 글이죠. “식민지를 근대화시켰다고?( http://crete.pe.kr/Recommendation/1963 )”라는 글입니다.

박통의 역할론을 논할 때마다 항상 따라오는 주제죠? 일본이 주장하는 (1) 인구 증가론, (2) 경제 성장률, (3) 문맹률 저하,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볼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이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추진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된 거 아니냐는 주장인데. 이를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반박한 글입니다.

겉으로 보는 통계 수치에는 일제의 조선 통치가 조선인들에게 유익했을 것 같은데, 막상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라는 주장이죠.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중에서 (3) 문맹률 저하 부분입니다.

일제 통치기간 동안 일제가 조선반도내의 교육 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한 것 같지만, 실제로 식민지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히 교육 시설과 초중고 취학생 숫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이걸 그냥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분석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해방 이후, 중고등학생의 경우 매년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이고 대학 진학자 역시 해방 당시 겨우 8천 명이던 수준에서 55년에는 8만 명 수준으로 증가하니까요. 제가 따로 부연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제 글을 찾아와 읽으실 수 있는 분들 정도면 이게 무슨 뜻인지 다 아실 겁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 방법을 박통의 업적 분석에 100% 그대로 적용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박통과 그 이후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박통의 공과에 대한 균형감을 잡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통계치와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민중들의 삶의 질 사이의 괴리라든가 아니면 해당 지도자의 퇴임후, 후임에 의한 성취도와 비교해 보는 노력들이 필요하겠죠.

Price index of land and goods.jpg

Growth-rate.jpg


위의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율을 보실 때, 이후 정부의 성장율과 비교하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북한의 경제 성장률과의 비교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북한의 경제 성장률 정보는 foog님의 글에서 빌려 봅니다.

한국전쟁은 북한경제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전후재건은 매우 빨랐다. 이 공산주의 국가는 산업, 특히 중공업을 증진시키기 위해 풍부한 광물자원을 활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1956년과 1963년 사이의 연간산업성장률은 25%다. 1965년에 산업(공업을 이야기하는 듯:역자주)은 전체 산출의 78%를 차지했고 농업은 22%를 차지했다. 이는 1946년의 상대적인 기여도의 정확히 반대의 모습이다. 1970년대 오일쇼크 전까지 북한은 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정권의 자주(주체)로의 추구는 1960년대 말까지 그들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고립되고 가장 규제된 경제체제로 바뀌게 했다.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DPRK) : Economy]

이밖에 한국사 사전에 등재된 '광복 이후 경제 '중 일부를 발췌 요약해 올립니다.

그리고 625 이후 박통 등장 이전까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약 22억8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한국경제는 1954∼1960년에 이르는 기간중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였고,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12.2%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결과 산업구조도 개선되어 제2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4년의 14.0%에서 1960년에는 20.5%로 상승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이 북한에 제공한 원조 내용도 살펴 보았습니다. 문제는 50년대 초반과 중반의 루블화를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할 도리가 없네요. sonnet님의 예전 글 중에 나토-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비지출 비교 (http://sonnet.egloos.com/3644278 )를 보시면 당시 루블화와 달러 환률을 합리적인 선에서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이 나옵니다.

중국은 1954-57년 동안 북한에 공업원료, 공업제품, 식량, 농기구, 어로기구, 철도건설 및 복구, 열차 차량 제공 및 수리 등의 방식으로 16억 루블(약 8,000억 위안) 상당의 원조를 제공함.

 - 1950년대 말 이후 중국의 대약진 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 경제개혁·개방 등 국내 상황 때문에 중국의 대북 지원은 한동안 주춤하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재개되기 시작함.

한국 농촌 경제 연구원 "중국의 대북 원조사"
http://www.krei.re.kr/kor/info/infor02_nkview.php?cpage=1&ni_idx=928&nk_code=N0004&part=A&nk_code=N0004&part=A

비슷한 시기에 북한과 소련의 관계도 좀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의 경우 구체적인 지원 액수 (비록 당시 루블과 위안의 실제 가치 측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에 대한 정보를 구한 반면, 소련에 의한 지원 액수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라도 정확한 정보를 알고 계신 분은 댓글로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구할 수 있는 그나마 비슷한 정보는 위키피디아로 부터 얻은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액수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1953-1956: 북소간의 문화. 경제, 교육 분야의 협력이 활발. 수 십만명의 북한인들이 소련에서 교육 받음.
1956-1966: 북소 관계 급냉. 소련으로부터 원조 중단.

http://en.wikipedia.org/wiki/North_Korea-Russia_relations


추가 자료 1: 진짜 북한에 대한 raw data를 보시고 싶은 분들께 유용한 사이트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에서 운영하고 있는 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 사이트입니다. 50년대의 북한과 소련,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간에 오간 전통문을 포함한 귀중한 자료들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이 곳에 보면 1956년에서 1966년 사이의 썰렁한 북소간의 관계가 외교관의 목소리를 통해 가감없이 나옵니다. 북한의 모습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씩 방문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http://www.wilsoncenter.org/index.cfm?fuseaction=topics.home&topic_id=230972

여기 보시면 북소간의 경제 원조에 대한 언급도 제법 있습니다. 즉 북소 관계가 냉각된 시기에도 원조가 완전히 중단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64년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가 헝가리 외무성에 보낸 전통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7년에 북소간 체결된 무상 벌목 조약(북한이 하바로프스크에 북한 인력을 보내 목재를 무상으로 벌목하여 북한으로 들여오는 조약. 일종의 무상 원조 형태)이 김일성의 1961년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10년 연장이 되었다. 1964년까지 북한은 약 2백만 입방미터 분량의 목재를 벌목하였고 현재 5천 명의 인력을 상주시키고 있다.

물론 이 전통문에서는 이런 경제원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아니고, 이랬던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을 언급하는 가운데 나온 내용입니다. 즉 당시 북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상호 비방과 함께 이 무상 벌목 프로그램이 파기되는 과정을 담고 있던거죠.
(내용을 살펴 보시면 조금 치사한 얘기도 나옵니다. 즉 소련 관리들이 북한 일꾼들이 일제 가전제품과 보드카 밀수를 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나오죠. -.-;;)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외관상으로 북소관계가 냉각되고 원조도 완전히 중단된 것 같은 와중에도 저런 경제나 군사적 원조가 나름대로 있었던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가령 65년 5월의 경우 소련 외상 바실리 쿠즈네초프와 소련주재 북한 대사 김평식간의 대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김평식이 1억5천만 루블의 무상 무기 원조에 감사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추가자료 2: 53-56년까지의 동구권의 대북 원조 금액 정보를 구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1960년도 자료입니다.

NK53-56.gif

이 자료에 근거하면, 한국 농촌 경제원 자료에 나온 8천억 위안과 1천배의 오차가 납니다. 어떤 자료가 틀린 건지 저도 궁금합니다.

아무튼.. 다들 즐거운 자료 검색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