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sonnet)에서 트랙백 ( http://sonnet.egloos.com/3836641 )


1. 한국전 이전의 수출진흥정책

sonnet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 같은 계획 경제안이 장면 정부에서 비롯해서 박정희 정부에서 꽃 피운 정책으로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승만 정부 당시의 경제 관료들의 노력을 한번 차분히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인 1949년 4월 15일 한국 정부는 ‘5개년 물동 계획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킵니다. 이는 농업, 광업, 금속기계기구, 섬유, 화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생산 및 수급 계획 그리고 수출입 계획 등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기계, 제철, 제강, 화학, 조선, 시멘트, 비료 등 중공업 육성도 동시에 추진한다는 내용이죠. 관련 자금은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Mission on Korea) 원조 금액과 대외무역으로 조달할 계획이었고요.

문제는 당시 미국 정부 내에서 『한일 경제 통합 논의』가 활발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가능하면 적은 원조 금액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를 원했죠. 따라서 한국으로 지급되는 원조가 일본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를 바랬습니다. 즉 일본 산업 부흥을 위해 한국이 일본 공산품의 판매 시장이 되기를 희망했고 따라서 한국의 공업화는 억제하자는 거죠.

육군성을 중심으로 한 이런 주장과 한국에서 경공업 중심의 경제 재건을 꾀하던 ECA의 갈등은 미국 의회의 원조 예산안 거부로 육군성 안이 득세하여, 결국 ECA 의장인 번스(Byrnes)로부터 원조 자금의 36%를 일본에서 구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야 일단락됩니다.

즉 이승만 정부가 정부 수립 후 야심 차게 추진했던 경제 개발 계획은 미국 정부의 한일 경제 통합 구상 덕분에 좌초하고 결국 1950년 3월 7일 재무부 장관이 발표한 ‘경제 안정 15원칙’으로 꼬리를 내리게 됩니다. 즉 경제 건설 보다는 균형 재정으로 인플레를 억제하여 안정을 먼저 이룬 뒤, 경제 건설은 그 이후에 한다는 것이죠.

당시 발표를 일부 옮겨 보겠습니다. 거의 60년 전의 정부 발표인데,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를 보는 것 같아 맘이 짠~~ 합니다.

 우리들의 금일 처지로서는 경제산업 전반에 걸쳐서 부흥계획을 최대한으로 추진코자 함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아직 실지회복이 완전치 못하여 또 국내자원을 무한히 개발할 기술과 물자와 자본도 넉넉지 못하여 당분간은 외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식할 때 우리들은 모든 경제활동에 있어서 최소의 물자자재 및 자금으로서 가장 신속히 최대의 생산증강을 기하도록 경제적 합리화와 경제순환의 정상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경제 안정론은 한국전쟁 발발로 그나마 얼마 없던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유엔군 대여금 조달 부담이 급증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인플레 문제 때문에 한동안 지속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재정 담당 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안정론이 대세를 이룬 것 같지만, 이후 등장하는 이승만 정부의 공식적인 경제 정책들을 보면, 주어진 환경에서 성장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음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령

1951년 8월 당시 기획처가 UNKRA(UN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유엔한국부흥국)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5개년 계획안』
1953년 8월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경제재건계획의 기본방침』
1954년 7월 이승만 방미 때 미국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한국경제부흥 5개년 계획안』

등을 보시면 모두 원조자금을 재원으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우리 정부의 경제 성장 제안은 미국에 의해 거부되죠.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당시 미국의 극동 정책은 일본의 공업화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으니, 한국의 공업화에 손을 들어 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대외적인 제약 속에서 이승만 정부가 경제 성장을 위한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강구 할 수 있는 건 수출 우대 정책을 통한 민간 무역 밖에는 없었죠. 따라서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다양한 수출 장려 정책들이 시행됩니다.

1951년에 ‘수출입품 링크제’라는 걸 도입해서 원조 자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간 산업 소재들을 수출품과 연계하여 도입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같은 시기에 수출을 통해 획득한 외화를 일정한 보상 비율만큼 채산성이 좋은 물품의 수입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수출 상여 제도’도 도입합니다. 아마 당시로서는 가장 확실한 수출 우대 정책이었을 겁니다. 이외에 구상무역 제도를 도입해서 일본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을 유도하기도 하고, 수출불 우대 제도라고 해서 인기 수입품은 수출을 통해 획득한 외화로만 수입이 가능하게 하는 제도도 도입합니다. 또한 특별 외화 대부제를 신설해서 산업 기자재 도입을 통한 생산 부흥도 추진하죠.

이쯤에서 sonnet님의 다음 표현에 대한 비판을 한번 해 보렵니다.

 “한국정부는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수출은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sonnet)

나중에 한번 더 언급을 하겠지만, 당시 한미간의 환율 논쟁은 엄청난 쟁점이었고 양측의 이익이 첨예하게 맞붙는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제한된 외환 보유고로 산업 부흥에 필요한 자본재를 낮은 가격으로 도입하기 위해 저환율 정책을 유지했던 것이고 또한 미국의 한국 공업화 억제 정책 하에서 경제 성장을 위한 자금 조달의 유일한 창구로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당시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거의 최선을 다했다고도 볼 수 있는 각종 정책을 실시합니다.

이런 우리 정부의 노력을 “환율 갖고 장난 쳐 미국을 벗겨 먹으려 드는 셈”이라고 폄하하거나 “미국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역, 국제수지 정책과 거리가 멀었다” 는 식의 냉소로 업신여길 사안은 아니었다고 봐야죠. 더구나 당시 미국이 생각하는 정책은 결코 우리 민족의 이익과 부합되는 정책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2. 한국전 이후의 수출 정책

한국전 휴전 이후, 소위 ‘부흥 원조’라는 것이 미국으로부터 대규모로 유입됩니다. 앞 장에서 언급한 ECA 원조의 경우처럼 한미간에 이 부흥원조를 둘러싼 시각차가 또 대두됩니다.

우선 미국의 입장부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일본 공업화를 위해 한국 경제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 (말이 좋아 경제 안정 정책이지, 재정 지출이 산업 부흥 쪽으로 투자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긴축 정책)을 기조로 일본 공산품을 한국 시장과 연결하는 지역 경제 통합을 추구하고 있었죠.

그런데 휴전 이후 한가지 문제가 더 생깁니다. 즉 한국전 특수로 일본 경제가 성장의 기반을 잡았는데, 휴전과 동시에 일본 경제에 심각한 불황이 몰아 닥칩니다. 즉 이 불황을 타개할 특수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또한 당시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중국과의 경제 관계 회복 움직임이 있었고, 미국 입장에선 이런 일본의 움직임을 적절히 견제할 당근이 필요했던 거죠. 즉 한국에 쏟아 붓는 원조자금으로 대일 구매를 성사시키자는 압력이 가해집니다.

한국은 한국대로 이 원조 자금으로 1949년 이래 추구해온 경제 성장 구상을 실현하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각종 경제 성장론과 자립 경제론을 주장합니다. 즉

1953년 8월 타스카(Henry J. Tasca) 조사단 (휴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본격적인 복구 사업 규모를 정확히 산출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1953년 4월 16일에 특사로 타스카를 한국에 파견함. 2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6월 1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이른바 타스카 보고서를 제출. 최소 3년 이상 동안 10억 달러 정도의 경제 원조를 제안. 그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3개년 부흥 계획을 작성하도록 요구)의 요구에 따라 “경제 재건 계획의 기본 방침”에서 경제 성장론을 주장했고 또한 1954년 7월의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 중 발표한 ‘한국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론을 설파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가 간절히 바라던 자본재 70%, 소비재 30%의 원조 내용은 미국의 반대에 묻히고 결국 자본재 30%, 소비재 70%로 미국의 주장이 관철되죠. 전주가 우기는데 별 도리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한국 정부가 추구하던 경제 성장을 위한 토대 마련에는 실패했지만, 중요한 점은 당시 이승만 정부도 경제 성장의 필요성을 깨닫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고 또한 적극적인 수출 진흥책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이겠죠. sonnet님 표현대로 전주가 튕기는 판에 얼마만큼의 운신이 가능했을까 하는 안쓰러움이 있는 것이지,

 “한국정부는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수출은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sonnet)

라는 식으로 당시 정부를 폄하할 기분은 안 들더군요.


3. 수출 진흥책의 축소

이후 몇 가지 미국에 의한 후속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즉 기존 한국 정부가 수출불 우대 정책을 통해 수출 진흥을 추진하던 것을, 수출불 우대가 지속될 경우 무역업자들에 의해 미국 원조불의 수요가 줄어들고 결국 미국 원조불의 환율이 하락할 것을 염려해서, 수출불과 원조불을 일반불로 통합하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이 조치는 수출 진흥책의 축소라는 무역 정책 일대의 변동을 촉발하게 되죠.

물론 당시 한국 정부 역시 수출에 의한 달러 확보보다는 원조에 의한 달러 확보가 용이했기에 이를 수용하지만 결국 이 정책은 두고 두고 문제가 되죠. 하지만 정부도 손을 놓고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원조불의 공매를 수출 실적과 연계하겠다고 지속적으로 미국에게 요청을 합니다만, 미국에 의해 계속 거부당하게 되죠. 하긴 정부 입장에서도 공업화 자금을 원조 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무역에 의존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출 진흥책을 추진할 동기는 감소했을 겁니다.


4. 원조 축소와 공산권의 평화 공세

50년대 중반에 국제 정세에 변화가 생깁니다. 즉 이전의 군사적인 냉전 관계에서 공산권에 의한 평화 공세라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죠. 예전 제 글에도 한번 언급이 있습니다만, 1958년 북한은 경제부분의 성장에 자신감을 바탕으로 남한에 자신들의 영해에서 남한 어부들이 어로작업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남북한 어업관계자 회의를 제안하는 등 본격적인 평화 공세를 시작합니다. 서방 입장에서 한국을 지금처럼 일본 공산품의 시장으로 묶어 두기에 점차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죠. 즉 공산권이 내세우는 북한의 경제 성장에 맞서 남한의 모습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을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더불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에 지출되는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자 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1956년에 한국에 부임한 경제조정관인 원(William E. Warne) 역시 한국의 경제 성장에 호의적이었고요. 즉 이제까지의 한국 공업화를 터부시 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바뀔 환경이 조성되어가는 셈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상공부가 추진한 ‘수출 무역 5개년 계획’을 1957년 2월에 있던 ‘합동경제 위원회’에 상정했다가 미국의 거부로 폐기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한국 정부의 다양한 수출 진흥 정책 노력은 계속되어 결국 1959년 2월 Draper의 방한 때, ‘합동경제 위원회’에서 ‘수출 진흥 분과 위원회’가 조직되게 되죠. ^^

국제적 환경 변화와 미국의 한국공업화 억제 정책의 약화에 더해 이런 이승만 정부의 수출 진흥 노력 덕분에 이승만 정부 말기 3년간의 수출 실적은 상당히 인상적인 변화를 보입니다.

1958년 1400만 달러
1959년 2000만 달러
1960년 3200만 달러

59년도와 60년도의 전년도 대비 수출 증가율은 42.9%와 60.0%의 놀라운 신장을 보입니다.

Export-Increase-Rate.jpg 

위의 자료는 WTO 홈페이지에 가서 통계를 다운로드 받아서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위의 도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미 이승만 정부 시절인 59년과 60년에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박정희 정부의 60년대 수출 증가율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수치가 아닙니다. 이런 자료를 보시면 박정희 정부의 수출 진흥책도 물론 효과적이었고 또한 그 노력을 높이 사는 것 역시 합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박정희 정부 출범 이전에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대대적인 수출 증가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일까요? 그리고 그런 준비를 미국과의 환율 전쟁속에서 묵묵히 시행해 온 이승만 정부와 당시 우리 국민들의 노력의 결과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또한 큰 오바일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5. 결론

물론 당시 이승만 정부의 각종 수출 장려 정책들과 경제 성장 정책들은 기본 준비도 미흡했고 또한 미국의 반대로 크게 소득을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도 손 놓고 나자빠져 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경제 성장을 위한 계획도 세우고 실제로 정책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고요. 이런 많은 정책적 시도와 노력들이 있었기에 장면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시절의 각종 경제 정책안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지요.

제가 이번 글에서 경제 성장 정책과 수출 촉진 정책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1953~1961년의 전후 복구 기간 동안 미국이 제공한 경제 원조액이 거의 23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막대한 원조 덕분에 비록 동일한 기간에 북한이 보인 경제 성장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54년부터 60년까지 연평균 4.5%의 성장률을 보입니다. 공업 부문에서는 12.2%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요. 또한 2차 산업 부분의 비중도 54년의 14%에서 60년에는 20.5%로 상승하죠.

이런 경제 성장을 통해 적어도 당시 섬유공업은 종래의 면방직 과 모방직 분야에서 큰 성장을 달성하고 나일론등 신제품의 생산 설비도 확충되어서 1957년에는 이미 국내 수요를 충족할 수준이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1960년에 수출 품목이 기껏해야 철광석이나 돼지털 같은 1차 상품이던 것이
일단 박정희 정부가 집권한 이후 1970년에는 주력 수출 상품으로 섬유 제품(전체 수출 품목의 40.8%)이 차지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런 성취는 박정희 정부만의 것이라는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죠? sonnet님 역시

 1964~5년 정도를 전환점으로 삼아 이 이후는 완연한 수출주도경제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 이전은 시행착오도 많았고, 이승만-장면 정부의 유산이 이어졌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이 이후의 결과는 공과가 모두 확실히 박정희 정부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셨지만 저는 이 표현 역시 사안을 종합적으로 본 시각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정책 입안과 실행자들이 들인 노력의 결과 적어도 당시 섬유산업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쟁력과 생산 능력을 갖추었다고 봐야죠. 이런 기반을 토대로 60년대 중후반 박정희 정부 시절 보인 섬유 제품들의 대대적인 수출 신장도 이해를 해야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도 아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으로 평가하는 요소로 삼는 것은 합리적인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이 정치적으로는 독재라는 어두운 부분이 있었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주어진 제약과 자원 한도 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는가 하는 입장입니다. 즉 자신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전임자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희화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DJ와 노통 임기 중에 우리나라의 미국 내 특허 출원과 특허 획득, 그리고 산업재산권 출원 건수가 4~5위로 올라섰습니다. 과학 기술 분야에 예전과 달리 막대한 예산을 투자한 결과 불과 개혁 정권 2회의 임기만에 이룬 업적이죠. 하지만 이런 업적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닙니다. 멀리 가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대적인 공대 증설에 따른 국내의 대규모 공대생 증가가 없었다면, 이 또한 이루어지기 힘들었겠죠.

한 지도자의 업적은 물론 당시 국민들의 노력과 국민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합작품인 것이 맞지만, 소위 어떤 업적이라는 것이 뿌리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는 없죠. 역사라는 틀에서 해석하고 앞뒤를 재며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족:

저는 처음 이 논쟁의 진행을 보며, 집단 지성의 한 예를 보는 듯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한가지 먼저 선을 그어 놓자면, 인터넷 상의 토론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A-Z의 항목을 열거하고 하나 하나 따져 맞추는 형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sonnet님 글의 동기가 된 foog님의 '
사실관계 확인의 중요성' 이란 글이 과연 sonnet님의 정리처럼

1)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이 표현을 sonnet님이 쓰신 방법으로 남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

2) 특히 박정희 시대에 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었다. (foog)

이란 두 가지 논점으로 압축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sonnet님께서 20th소년소녀님의 글을 보며 지적한 “민중주의적 해석”의 오류를 sonnet님 글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었다고 보고, 그런 면에서 sonnet님의 이번 글은 적절한 반론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이런 점을 일단 감안한 상태에서 sonnet님께서 자신의 논점이라고 정리하신 두 가지 항목에 대해 반론을 펼쳤던 겁니다.

 1)항에 대한 제 의견은 남한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무상원조를 받아서라기 보다도 무상원조를 끊어나간 데 요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2)항에 대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제목만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북한이나 사회주의 국가를 베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sonnet)


1)항에 대한 제 의견은 “이승만 정부가 수출진흥을 위해 자체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의 한일 경제 통합 구상에 의한 한국 공업화 억제 정책에 의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항에 대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이전에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줄기차게 추진되어 온 정책 형태로 당시 공산권의 경제개발 계획과는 직접 연관은 없지만, 계획 경제라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정책이다”라는 겁니다.



참고문헌: 제가 이 글에서 인용한 각종 문헌들과 수치, 그리고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지역과 역사 제 11호 (2002.12)에 수록된 차철욱 부산대 교수님의 “
1950년대 미국의 대한 원조정책 변화와  이승만정권의 수출정책 ”에서 얻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