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 (2)
농지개혁의 효과
1. 서론
오늘의 글은 60년대 경제 성장의 외적 요인을 다룬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1) 베트남전쟁 참전의 효과 ☜’ 에 이은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 시리즈의 2번 째 글입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실시된 농지개혁이 60년대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50년대 추진된 몇 가지 정책들이 이후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사례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글타래 역시 sonnet님의 다음 주장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60년대의 외적 경제 지표들의 긍정적인 변화들을 유도한 주요 성공 요인은 집권 초반, 즉 61~64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자립 경제 확립 정책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65년을 기점으로 수출 주도형 정책으로 변신한 것이 그 주된 이유라는 sonnet님의 주장에 대해
오늘은 우리나라 내부에 이미 준비된 요인들 중에서 60년대의 경제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친 별도의 요인은 없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그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소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내부적 요인들
2.1 농지개혁
월간조선을 포함한 다수의 보수 매체들은 농지개혁의 업적을 이승만에게 돌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당시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하던 지주들에 맞서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좌익적 성향의 조봉암을 앞장 세워 농지개혁을 이루어냈다는 말이죠. 따라서 오늘 제 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농지개혁의 긍정적인 결과물이 모두 이승만의 업적이라는 것이 이들 보수 매체의 주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좁고 짧게 보는 시각은 보수적 학자들의 박정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는 늘 나오는 방식입니다. 명색이 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글을 그런 식으로 써도 되는지 가끔은 안쓰럽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2.1.1 농지개혁 실시 이전의 상황
이미 46년 미군정도 농지개혁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여, 귀속 농지 불하를 포함한 온건한 방식의 소작 개혁을 추진합니다. 물론 배경은 당시 소련에 의한 북한 지역의 농지개혁이 신속하게 이루진 점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될 수 있죠.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좌우익 할 것 없이 미군정의 농지개혁 시도에 반대를 하고 나선 겁니다. 이유는 각각 다르죠.
정청세, ‘해방후 농지개혁의 사회적 조건과 형성 과정’ 석사학위 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하지만 미군정 역시 이런 반대 여론에 잠시 속도 조절을 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귀속 농지 불하와 관련된 각종 법률적 준비를 마쳐 몇 가지 기준을 마련합니다. 그 기준은 토지 소유 상한선, 지주 토지 보상 시가 와 보상 방식에 있어서 당시 지주 계급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지주 계급에게는 불리하고 농민들에게 나름대로 유리한 방식의 귀속 농지 불하가 실제로 48년 5.10 총선 직전인 3월 22일 미군정에 의해 실시됩니다. 전체 소작지 130만 정보의 15%에 해당되는 20만 정보가 농민들에게 불하되는데, 당시 귀속 농지가 여타 농지에 비해 우량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물론 5.10 총선을 앞둔 미군정의 이런 귀속 농지 불하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인 함의가 있습니다.
정청세, ‘해방후 농지개혁의 사회적 조건과 형성 과정’ 석사학위 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에서 2차 인용
좌우익 할 것 없이 농민들이 모두 이 조처에 환영을 한 이유는 당시 일반적인 소작료(소출의 30~40%)보다 훨씬 저렴한 현물(소출의 20%)을 15년에 걸쳐 분납하기만 하면 자신의 땅이 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죠. 이 말은 반대로 지주 계층에는 꽤나 불리한 조건이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미군정에 의한 이 조처는 아주 섬세한 정치적 고려에 따른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정청세, ‘해방후 농지개혁의 사회적 조건과 형성 과정’ 석사학위 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p61
2.1.2 이승만 정부에 의한 농지개혁
위에 언급한 농민들에게 유리한 농지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의 확산을 등에 엎고 이승만 정부는 정식 출범 이후 농지개혁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한 전향적 입장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원인이 있죠.
(1) 식민지 시기부터 누적되어 온 농민운동 경험을 통한 내적 역량의 향상에 따른 농민들의 강력한 농지개혁 요구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었다면,
(2) 지주 계급 같은 구체제 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함으로써 이들이 앞으로 정부 정책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죠.
비슷한 시기에 독립을 경험한 많은 나라들에서 지주 계급에 의한 정치권에서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저 당시 이승만이 자신의 집권에 가장 큰 지지 세력이었던 지주계급을 집권 개시와 함께 제거해 버린 걸 보면, 이 양반이 정말이지 정치적인 감각은 타고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토사구팽이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불러도 좋은데, 이승만은 지주 계급의 계급적 지위 약화를 통한 국가 자율성, 좀 더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권한 강화를 제도적으로 확보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밑으로부터의 농지개혁 요구를 탄압하기 보다는 이를 제도적으로 흡수하려고 하였죠.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승만 정부는 이후 역사가 평가할 때,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은 정책 방향을 잡았습니다. 물론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지주 계급, 즉 민국당(구 한민당)은 계속해서 올라오는 정부안을 부결하고 자신들의 안 (산업위원회안)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얻었지만, 자신들의 물적 토대, 즉 농지를 잃고 지주 계급이 해체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하게 되죠.
정청세, ‘해방후 농지개혁의 사회적 조건과 형성 과정’ 석사학위 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에서 2차 인용
군정 기간과 이승만 정부 출범 이후의 농지개혁을 통틀어 소작지에서 자작지로 변경된 면적은 45년 소작지 기준으로 88%에 이릅니다. 물론 여기에 절반 정도는 눈치 빠른 지주들이 농지개혁 이전에 자신들의 농지를 발 빠르게 방매해 버린 농지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45년 35%의 자작지 면적은 51년 92%까지 올라가게 되죠. 자작농 비율도 45년에 14% 정도이던 것이 51년에는 81% 정도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이런 대규모 자작농 증가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음 절에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2.1.3 농지개혁과 농업 생산력의 향상
일견 당연한 얘기 같습니다만, 농민들이 자기 땅에 농사를 지을 경우,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력유지와 농업 생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겠죠. 따라서 식민지 시절과 60년대 초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향상이 관찰됩니다. 단보당 미곡수확량이 1.03석에서 1.54석으로 거의 50% 이상 증가하고 토지이용률도 140.5%에서 150.8%로 상승하죠.
이런 농업 생산력의 향상 덕분에 식량 공급 자체가 증가하게 됩니다. 식민지 시절 200만 톤 규모의 미곡 생산이 60년대 초에는 350만 톤 규모로 증가하고 보리와 과일 야채 모두 50%에서 300% 정도의 생산 증가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증가한 식량 공급은 이후 60. 70년대에 도시로 진출한 제조업 노동자들에게 낮은 가격의 식료품 제공을 가능하게 하여 주는 효과를 냅니다.
이런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식량 공급 증가 이외에도 60, 70년대의 경제 성장에 미친 또 다른 영향을 살펴보죠.
2.1.4 농가 소득 증대에 따른 우수한 인력 배출
장상환,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경제발전연구 제 6권, 제 1호, 2000
즉 소작료에서 해방되고 또한 자작지 농사에 따른 농업 생산력 증가 덕분에 농민들은 예전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이런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자녀 교육에 투자를 했고, 이런 교육 투자의 결과 60년대 이후 경제 성장에 필요한 양질의 노동자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 셈이죠.
해방 이후 60년까지의 대학교와 대학생 증가 (각각 330%, 1200% 증가)를 통한 고급 인력 공급이 60년대 이후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원인을 농지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학교와 대학생수가 1945년 19개 대학 7,819명에서 1960년 63개 대학에 97,919명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농촌에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이 된 농민들의 소득수준 향상이 있었던 것이다.
50-60년대에 흔히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농민의 수탈에 의한 대학의 비대한 성장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부 농가에는 당시의 어려운 농촌사정하에서 소를 팔아서라도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상환,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경제발전연구 제 6권, 제 1호, 2000
2.2 교육 투자
이런 농민들의 경제적 여유와 맞물려 이승만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된 교육 투자 내역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장상환,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경제발전연구 제 6권, 제 1호, 2000 에서 2차 인용
물론 이런 교육 분야 투자는 이승만 정부만의 전유물은 아니고, 60, 70년대 박정희 정부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80년대는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8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도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고 있는 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3. 결론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한 국가가 특정 시기에 거둔 경제적 성장의 원인을 한두 가지의 요인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겠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지난번 글에서 소개한 정량화가 어느 정도 가능한 베트남전쟁 참전 효과와 그리고 오늘 소개해 드린 농지개혁과 교육투자 같이 일반적으로 인정이 되는 요인들과는 달리 정량화가 어렵거나 사안이 미묘한 분야의 경우,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과 연관시키기가 더 까다롭겠죠.
이제 이 논쟁을 거치며 제가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는 생각들을 좀 정리해 볼까 합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던 아니면 그 지도자가 이끄는 민족이나 집단이던, 아무런 토대도 없이 맨 손으로 시작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주변 환경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고요. 주어진 환경은 과거의 다른 지도자나 집단이 남겨 놓은 조건이거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일방적인 요소들입니다. 이 전수된 조건들은 짐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특정 지도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전수된 조건을 폄하하고 당대의 성과를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명백히 유리한 외부 조건에 대해선 입을 씻고 잘된 결과는 모두 자기 덕분이라고 성과를 과장하는 태도도 정정당당하지 못합니다. 과연 베트남전쟁 참전이 없었어도, 그리고 해방 후 이루어진 농지개혁이 없었어도, 또한 50년대 어렵던 시기에 이루어진 교육 분야 투자가 없었어도 보수 매체가 찬양하는 박정희 신화가 가능했을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이건 박정희에게도 적용이 되지만 또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즉 DJ와 노통 시절 거둔 과학기술 분야의 괄목한 성장과 노통 시절 이룬 엄청난 수출 증가 역시 과거 정부가 전수한 조건들과 외부 환경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죠.
이제 다음 번 글에서 박정희 시절의 개발 독재 권력이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점검하는 것으로 이 시리즈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근데 제가 읽은 바로는 SONNET님의 글에서 박정희 찬양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리고 만약에 말씀하신바대로 박정희 이전의 이승만 정권의 점진적 개혁조치에다가 한국경제발전의 공을
어느정도 돌릴 수 있다면 낙성대연구소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방 이전 식민지 시기의 점진적 개혁조치들도
그 자체에 내재된 많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의 공이 돌아갈 수 있지 않나요?
두 번째 문단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유야 어떻던지 이전 정부나 시기에서 이루어진 개혁이 경제발전에 조금이라도 일조를 했다면 경제발전의 공 중에서 일부라도 인정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고 말 입니다.
그에 대한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서 볼 수 있겠죠.
첫번째로 그 시기의 경제 성장이라는 것이 실제 한국 사회의 잠재 성장 능력을 충분히 살린 것이냐 아니면 오히려 억누르고 있었냐 하는 걸로 차이가 난다고 봅니다.
두번째로는 그 경제 성장의 과실이 대중에게 충분히 나누어졌는지가 관건이라고 보고요.
이 두가지를 가지고 판단을 해 본다면 일제 강점기의 경제발전이라는 건 '공'보다는 '과' 혹은 '손'이 더 많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뭐 이런 얘기를 해 드린다고 해서 알아 들으실 것 같지는 않지만... 베트남전 참전의 경우 이승만 전대통령도 무척이나 미국에 구애(?)를 했죠.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로 베트남전 참전이 안보문제와 경제발전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줄 카드라고 봤던 건 이승만 전대통령과 마찬가지였고요. 박정희 전대통령이 운이 좋았던 건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의 전환이 그의 임기 초반에 발생했다는 거겠죠.
사람들은 박정희 전대통령 임기중의 경제성장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베트남전 참전이 없었다면 남미꼴 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죠. 그것도 집권 2년안에 파산이 날 정도로 말이죠.
그걸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국제정세의 변화 흐름을 운좋게 탄 것인지는 각자 판단하기 나름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