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수 40
등록일 2006-10-27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노짱방에만 계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국제방에서 제 이미지는 북한의 허술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으로 북빠들에게 각인되어 있답니다. 최근에도 북빠들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반박글을 올려 북빠들과 한바탕 난리를 치기도 했고요.
그런 제가 김정일을 위한 변명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되다니.. 혹시라도 낚시성 제목에 실제 내용은 김정일과 북한을 비꼬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계시겠지만 이번 글 내용은 제목과 일치합니다.
물론 북한과 김정일을 비난하는 내용이 100% 없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 미국 내 주류층의 주장 역시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감이 있어서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균형감각을 드리고 싶어서 자판을 두들기게 됐습니다. 한번 미국과 북한이 이번 핵실험을 포함한 동북아의 긴장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실 자료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1) 첫 번째 변명 (1989-1993)
여러분의 기억력을 있는 대로 쥐어짜서 90년대 초반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시죠.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강력한 북방 정책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이루어집니다.
1989년: 2월 헝가리, 11월 폴란드, 12월 유고슬라비아와 정식 수교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고르바초프 간 정상회담, 9월 소련과 정식 수교
1991년: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 대표부 개설
1992년: 4월 고르바초프 방한, 8월 중국과 정식 수교
이게 노태우 정권의 업적이던 아니면 시대적인 흐름이던 상관없이 김정일과 북한 정권입장에서는 급격히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엄청난 자괴감을 맛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으로써 당연히 체제 위기감이 고조됐다고 봐야죠.
더군다나 1976년부터 시작된 팀스피릿 훈련은 1984년부터는 아예 참가 병력이 20만 명을 넘어서고 B-52 폭격기와 랜스 미사일까지 동원되는 등 훈련에 핵공격 능력을 보유한 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훈련기간까지 50-90일로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1992년에는 1991년에 이루어진 남북합의서에 따라 중단이 되기도 했지만 1993년 3월에는 비록 규모와 기간이 축소되기는 했어도 다시금 훈련이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남쪽 당사자인 김영삼 정부는 오락가락 대북 정책 끝에 초강경 대북 기조를 유지하며 심지어 미국과 북한간의 협상조차 반대하는 상황이었고요. 얼마 전 조선일보의 허용범 워싱턴 특파원이 로버트 갈루치 전 핵특사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보면 당시 갈루치 특사의 증언이 나옵니다. 한승주 당시 외무부 장관은 제네바합의 방식을 지지한 끝에 정부를 떠난대 반해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하는데 반대했다고.
이런 한국정부와 미국에 의한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압박에 북한은 이미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마땅히 손을 쓸만한 카드가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도가 따로 뭐가 더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북한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 최적의 방안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1991년 12월에 남북간에 합의 발표한 남북합의서에 근거해서 남북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고 남북간의 경제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전력투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이 남북합의서에 근거해서 1992년에는 그 이전에 거의 20년간 매년 실시되던 팀스피릿 훈련까지 중지시키는 성의를 남한과 미국 쪽에서 보여주었는데도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북한의 위기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남북합의서에 합의한 내용을 착실히 시도해 보지도 않고 핵개발을 추진해 한반도에서 긴장을 야기했어야 했는가 하는 씁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과연 북한 정권 안정에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도 의심스럽고요.
(2) 두 번째 변명 (1994-2000)
제 1차 북핵 사태야 대부분 내용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소위 제네바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극적으로 북한과 미국간에 일괄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내용을 잠시 보시죠.
첫째는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한다.
(미국은 2003년을 목표로 2000MWe 용량의 경수로 발전소를 북한에 제공하고, 1호 경수로발전소 완공시까지 난방 및 발전용 중유를 매년 50만t 수준으로 지원키로 한다. 북한은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영변핵시설)을 동결한 뒤 경수로발전소가 최종 완공되면 이를 해체키로 한다.)
둘째는 북미간 정치 및 경제 관계의 완전 정상화이다.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통신 및 금융거래를 포함해 무역, 투자 장벽을 완화키로 한다. 또한 서로간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진전 상황에 따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기로 한다.)
셋째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북한을 위협하지도 않아야 하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로 한다.)
넷째는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 강화를 위해 협력한다.
(북한은 NPT에 잔류하고 핵안전협정을 이행하며 `경수로 공급협정`이 서명되는 즉시 핵시설에 대한 IAEA의 핵사찰을 수용키로 한다. 또한 북한은 경수로의 상당 부분이 완공된 후 핵심부품이 도착하기 이전에 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
소위 미국 내에서 온건파가 되었건 강경파가 되었건 한결 같이 하는 이야기가 북한이 속였다거나 북한에 좌절감을 느꼈다는 내용입니다.
전 솔직히 미국이나 북한 모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서로가 속았다는 느낌을 상대방이 받도록 행동했고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좌절감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양쪽의 불성실이 너무 컸습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의무는 매년 중유 50만 톤을 제공하는 것뿐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북한이 미쳤습니까? 그까짓 중유 50만 톤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추진한 핵 개발을 포기하게. 실질적으로 북한이 가장 많이 기대한 것은 두 번째 합의 내용인 북미간의 정치 경제 분야 완전 정상화였다고 봅니다.
실제로 미국은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통신 및 금융거래를 포함해 무역, 투자 장벽을 완화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 했어야 했었고요. 하지만 클린턴이 뭐라고 변명을 하던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딴지에 걸려 적어도 두 번째 합의 내용에 있어서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책임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결국 6년이나 지난 2000년 6월에서야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으니 북한 입장에서야 미국에 신뢰를 주기가 어려웠다고 보는 건 하나도 이상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북한은 모범생처럼 착실히 자신이 담당할 내용을 성실히 지켰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죠. (-.-;)
미국이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실시할 각종 경제적 정치적 관계 정상화를 지속적으로 미루고 있으니 북한 역시 보험 차원에서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비밀리 추진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당시 경수로 건설비용의 70%인 32억 달러를 투자하는 한국의 심사를 거슬리는 짓도 많이 했습니다.
참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북한이 좋은 시절 다 날렸다는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쩝… 당시에는 북한은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동안 버팅 기느라 2003년 완공 예정으로 못 박아 놓은 경수로 건설이 한동안 연기되어 겨우 1997년 8월에나 가서야 착공식이 거행됐고 한창 남북과 미국간의 분위기가 좋던 1996년 9월에는 느닷없이 강릉에 잠수함 사건을 터뜨리는 바람에 물 좋은 분위기를 싹 흐리는 멍청한 짓도 꾸준히 했죠.
강릉 잠수함 사건이 북한 내 강경파에 의한 우발적 사건이던 아니면 통상적으로 벌어지던 대남 정보 수집 활동의 일환이었건 상관없이 당시 일을 처리하는 북한은 적어도 제네바 합의에 대해 사려 깊은 고려를 하고 있지 못했다고 보입니다. 북한이 합의문 3번을 위반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재미없는 얘기가 지속되니 싫증이 나시는 분들을 위한 짤막한 상식 한 가지.
김영삼 대통령의 묻지마 대북 강경책 이후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과 협상을 마무리 한 다음 남한 정부에 보내 청구서는 경수로 공사비 총액 46억 달러 중 70%인 32억 달러를 담당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건설이 자꾸 지연이 되면서 공사비는 눈덩이처럼 증가해서 나중에는 60억 달러를 상회하는 예상 건설비 견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남한 정부가 떠안을 뻔한 금액은 대략 40억 달러를 상회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건지 당시 강경론을 주도한 김영삼 정권에서 32억 달러의 대북 지원금에 대해 불평을 했다거나 하는 내용을 본 적이 없습니다. 32억 달러면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일단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북 퍼주기에 대해서 알아보죠. DJ와 노통의 집권기간 중 북한에 지원한 금액에 대해서는 정부 쪽은 가급적이면 적게, 그리고 한나라당에서는 제 각각입니다. 한번 서울신문에 난 도표 하나 보시죠.
정부 공식입장은 지난 8년간 2조 3천억이죠?
경수로 건설에 우리가 부담할 뻔한 몫이 32억 달러로 우리나라 돈으로 3조 2천억 원입니다. 어버버버 하다가 생색도 못 내고 국민들 지갑에서 생돈이 빠져나갈 뻔한 겁니다. 실제로 건설이 다 완성되었다면 4조원 이상 투입되었을 겁니다. 이래도 DJ와 노통 시절의 대북 퍼주기(?)가 이전 정권에 비해 무리한 사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솔직히 요즘 정부가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면서 개성 공단 사업과 금강산 사업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점수를 줍니다. 아무래도 계산서 청구는 자기 스스로 뽑는 게 싸게 먹히는 법이죠.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90년대 중반, 즉 제네바 합의 후 1년 이내에 북한은 미국이 진정으로 자신들과 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충분한 분위기는 조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 분위기가 장장 6년이나 지속되었으니..
남한이나 미국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로 과연 북한이 군사적 도발에 대해 분명한 포기 의사가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을 테고요.
이 시점에서 북한의 실수와 미국의 늦장에 대해 탓을 하라면 저는 미국에게 조금 더 큰 돌을 던지고 싶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야 자신들의 목숨을 건 협상이었지만 미국에게는 그게 그렇게 큰 양보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2000년에 보여주었던 성의를 1994년이나 늦어도 1995년까지만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아무튼90년대 후반으로 가면 북한으로써는 내부적으로 더 이상 제네바 합의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라늄 농축 기법을 통한 우회로라고 하지만 대담하게 핵개발도 뒷전에서 추진했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고 보고요.
이미 93년 이후 중단되었던 핵폭탄 개발용 고폭실험도 98년부터 다시 재개되어서 98-99년 사이에만 평북 구성 인근지역에서 3-4차례의 고폭실험을 시작했고요. 이 모든 것이 북미 양쪽의 불신에 의한 갈등의 상승 작용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올브라이트 전 미국무부 장관의 자서전에 따르면 2000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2000년 말 워싱턴을 방문하도록 초청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김정일은 이런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DJ의 평양 방문 때 보여준 김정일의 스타일이랄까 개인적인 풍모들은 이전 우리가 3류 찌라시에서 들어왔던 기쁨조에 둘러싸인 플레이보이와 서양 영화광 같은 또라이 이미지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만약 2000년 가을이나 겨울에 김정일이 워싱턴을 방문해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미국 정계에 보여주었더라면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효과를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김정일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때 만약 북미간에 관계가 개선이 되었다면 현재 개성공단은 적어도 규모가 10배 이상은 컸을 겁니다. 그리고 북한은 내부적으로 적어도 경제부분에 한해서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풍족한 상태가 되었을 테고요. 우리도 덕분에 저 한나라당의 광분하는 꼬락서니를 보지 않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하지만 봄바람 불던 시절은 2000년을 마지막으로 꼴통 부시의 등장으로 칼바람 부는 북풍한설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
아 참… 이 글의 제목이 김정일을 위한 변명이죠. 한 가지 변명을 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뒤에서 몰래 운영을 했건 국지적인 군사 분쟁을 일으켰건 간에 그래도 북한은 적어도 영변 핵시설의 동결은 꾸준히 준수해 왔습니다. 경수로 건설도 밍기적거리고 관계개선에도 늦장을 부린 미국도 중유는 꾸준히 제공해 왔고요. 최소한 판이 깨지지는 않을 만큼만 서로의 기본적인 의무를 합니다. (-.-;)
(일단 내용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후반부는 다음에)
김정일을 위한 변명 (1)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양쪽의 불성실이 너무 컸습니다.
등록일 2006-10-27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노짱방에만 계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국제방에서 제 이미지는 북한의 허술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으로 북빠들에게 각인되어 있답니다. 최근에도 북빠들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반박글을 올려 북빠들과 한바탕 난리를 치기도 했고요.
그런 제가 김정일을 위한 변명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되다니.. 혹시라도 낚시성 제목에 실제 내용은 김정일과 북한을 비꼬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계시겠지만 이번 글 내용은 제목과 일치합니다.
물론 북한과 김정일을 비난하는 내용이 100% 없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 미국 내 주류층의 주장 역시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감이 있어서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균형감각을 드리고 싶어서 자판을 두들기게 됐습니다. 한번 미국과 북한이 이번 핵실험을 포함한 동북아의 긴장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실 자료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1) 첫 번째 변명 (1989-1993)
여러분의 기억력을 있는 대로 쥐어짜서 90년대 초반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시죠.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강력한 북방 정책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이루어집니다.
1989년: 2월 헝가리, 11월 폴란드, 12월 유고슬라비아와 정식 수교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고르바초프 간 정상회담, 9월 소련과 정식 수교
1991년: 1월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 대표부 개설
1992년: 4월 고르바초프 방한, 8월 중국과 정식 수교
이게 노태우 정권의 업적이던 아니면 시대적인 흐름이던 상관없이 김정일과 북한 정권입장에서는 급격히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엄청난 자괴감을 맛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으로써 당연히 체제 위기감이 고조됐다고 봐야죠.
더군다나 1976년부터 시작된 팀스피릿 훈련은 1984년부터는 아예 참가 병력이 20만 명을 넘어서고 B-52 폭격기와 랜스 미사일까지 동원되는 등 훈련에 핵공격 능력을 보유한 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훈련기간까지 50-90일로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1992년에는 1991년에 이루어진 남북합의서에 따라 중단이 되기도 했지만 1993년 3월에는 비록 규모와 기간이 축소되기는 했어도 다시금 훈련이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남쪽 당사자인 김영삼 정부는 오락가락 대북 정책 끝에 초강경 대북 기조를 유지하며 심지어 미국과 북한간의 협상조차 반대하는 상황이었고요. 얼마 전 조선일보의 허용범 워싱턴 특파원이 로버트 갈루치 전 핵특사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보면 당시 갈루치 특사의 증언이 나옵니다. 한승주 당시 외무부 장관은 제네바합의 방식을 지지한 끝에 정부를 떠난대 반해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하는데 반대했다고.
이런 한국정부와 미국에 의한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압박에 북한은 이미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마땅히 손을 쓸만한 카드가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도가 따로 뭐가 더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북한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 최적의 방안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1991년 12월에 남북간에 합의 발표한 남북합의서에 근거해서 남북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고 남북간의 경제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전력투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이 남북합의서에 근거해서 1992년에는 그 이전에 거의 20년간 매년 실시되던 팀스피릿 훈련까지 중지시키는 성의를 남한과 미국 쪽에서 보여주었는데도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북한의 위기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남북합의서에 합의한 내용을 착실히 시도해 보지도 않고 핵개발을 추진해 한반도에서 긴장을 야기했어야 했는가 하는 씁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과연 북한 정권 안정에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도 의심스럽고요.
(2) 두 번째 변명 (1994-2000)
제 1차 북핵 사태야 대부분 내용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소위 제네바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극적으로 북한과 미국간에 일괄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내용을 잠시 보시죠.
첫째는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한다.
(미국은 2003년을 목표로 2000MWe 용량의 경수로 발전소를 북한에 제공하고, 1호 경수로발전소 완공시까지 난방 및 발전용 중유를 매년 50만t 수준으로 지원키로 한다. 북한은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영변핵시설)을 동결한 뒤 경수로발전소가 최종 완공되면 이를 해체키로 한다.)
둘째는 북미간 정치 및 경제 관계의 완전 정상화이다.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통신 및 금융거래를 포함해 무역, 투자 장벽을 완화키로 한다. 또한 서로간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진전 상황에 따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기로 한다.)
셋째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북한을 위협하지도 않아야 하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로 한다.)
넷째는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 강화를 위해 협력한다.
(북한은 NPT에 잔류하고 핵안전협정을 이행하며 `경수로 공급협정`이 서명되는 즉시 핵시설에 대한 IAEA의 핵사찰을 수용키로 한다. 또한 북한은 경수로의 상당 부분이 완공된 후 핵심부품이 도착하기 이전에 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
소위 미국 내에서 온건파가 되었건 강경파가 되었건 한결 같이 하는 이야기가 북한이 속였다거나 북한에 좌절감을 느꼈다는 내용입니다.
전 솔직히 미국이나 북한 모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서로가 속았다는 느낌을 상대방이 받도록 행동했고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좌절감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양쪽의 불성실이 너무 컸습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의무는 매년 중유 50만 톤을 제공하는 것뿐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북한이 미쳤습니까? 그까짓 중유 50만 톤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추진한 핵 개발을 포기하게. 실질적으로 북한이 가장 많이 기대한 것은 두 번째 합의 내용인 북미간의 정치 경제 분야 완전 정상화였다고 봅니다.
실제로 미국은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통신 및 금융거래를 포함해 무역, 투자 장벽을 완화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 했어야 했었고요. 하지만 클린턴이 뭐라고 변명을 하던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딴지에 걸려 적어도 두 번째 합의 내용에 있어서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책임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결국 6년이나 지난 2000년 6월에서야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으니 북한 입장에서야 미국에 신뢰를 주기가 어려웠다고 보는 건 하나도 이상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북한은 모범생처럼 착실히 자신이 담당할 내용을 성실히 지켰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죠. (-.-;)
미국이 합의문 서명 후 3개월 내에 실시할 각종 경제적 정치적 관계 정상화를 지속적으로 미루고 있으니 북한 역시 보험 차원에서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비밀리 추진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당시 경수로 건설비용의 70%인 32억 달러를 투자하는 한국의 심사를 거슬리는 짓도 많이 했습니다.
참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북한이 좋은 시절 다 날렸다는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쩝… 당시에는 북한은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동안 버팅 기느라 2003년 완공 예정으로 못 박아 놓은 경수로 건설이 한동안 연기되어 겨우 1997년 8월에나 가서야 착공식이 거행됐고 한창 남북과 미국간의 분위기가 좋던 1996년 9월에는 느닷없이 강릉에 잠수함 사건을 터뜨리는 바람에 물 좋은 분위기를 싹 흐리는 멍청한 짓도 꾸준히 했죠.
강릉 잠수함 사건이 북한 내 강경파에 의한 우발적 사건이던 아니면 통상적으로 벌어지던 대남 정보 수집 활동의 일환이었건 상관없이 당시 일을 처리하는 북한은 적어도 제네바 합의에 대해 사려 깊은 고려를 하고 있지 못했다고 보입니다. 북한이 합의문 3번을 위반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재미없는 얘기가 지속되니 싫증이 나시는 분들을 위한 짤막한 상식 한 가지.
김영삼 대통령의 묻지마 대북 강경책 이후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과 협상을 마무리 한 다음 남한 정부에 보내 청구서는 경수로 공사비 총액 46억 달러 중 70%인 32억 달러를 담당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건설이 자꾸 지연이 되면서 공사비는 눈덩이처럼 증가해서 나중에는 60억 달러를 상회하는 예상 건설비 견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남한 정부가 떠안을 뻔한 금액은 대략 40억 달러를 상회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건지 당시 강경론을 주도한 김영삼 정권에서 32억 달러의 대북 지원금에 대해 불평을 했다거나 하는 내용을 본 적이 없습니다. 32억 달러면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일단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북 퍼주기에 대해서 알아보죠. DJ와 노통의 집권기간 중 북한에 지원한 금액에 대해서는 정부 쪽은 가급적이면 적게, 그리고 한나라당에서는 제 각각입니다. 한번 서울신문에 난 도표 하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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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로 건설에 우리가 부담할 뻔한 몫이 32억 달러로 우리나라 돈으로 3조 2천억 원입니다. 어버버버 하다가 생색도 못 내고 국민들 지갑에서 생돈이 빠져나갈 뻔한 겁니다. 실제로 건설이 다 완성되었다면 4조원 이상 투입되었을 겁니다. 이래도 DJ와 노통 시절의 대북 퍼주기(?)가 이전 정권에 비해 무리한 사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솔직히 요즘 정부가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면서 개성 공단 사업과 금강산 사업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점수를 줍니다. 아무래도 계산서 청구는 자기 스스로 뽑는 게 싸게 먹히는 법이죠.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90년대 중반, 즉 제네바 합의 후 1년 이내에 북한은 미국이 진정으로 자신들과 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충분한 분위기는 조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 분위기가 장장 6년이나 지속되었으니..
남한이나 미국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로 과연 북한이 군사적 도발에 대해 분명한 포기 의사가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을 테고요.
이 시점에서 북한의 실수와 미국의 늦장에 대해 탓을 하라면 저는 미국에게 조금 더 큰 돌을 던지고 싶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야 자신들의 목숨을 건 협상이었지만 미국에게는 그게 그렇게 큰 양보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2000년에 보여주었던 성의를 1994년이나 늦어도 1995년까지만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아무튼90년대 후반으로 가면 북한으로써는 내부적으로 더 이상 제네바 합의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라늄 농축 기법을 통한 우회로라고 하지만 대담하게 핵개발도 뒷전에서 추진했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고 보고요.
이미 93년 이후 중단되었던 핵폭탄 개발용 고폭실험도 98년부터 다시 재개되어서 98-99년 사이에만 평북 구성 인근지역에서 3-4차례의 고폭실험을 시작했고요. 이 모든 것이 북미 양쪽의 불신에 의한 갈등의 상승 작용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올브라이트 전 미국무부 장관의 자서전에 따르면 2000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2000년 말 워싱턴을 방문하도록 초청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김정일은 이런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DJ의 평양 방문 때 보여준 김정일의 스타일이랄까 개인적인 풍모들은 이전 우리가 3류 찌라시에서 들어왔던 기쁨조에 둘러싸인 플레이보이와 서양 영화광 같은 또라이 이미지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만약 2000년 가을이나 겨울에 김정일이 워싱턴을 방문해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미국 정계에 보여주었더라면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효과를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김정일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때 만약 북미간에 관계가 개선이 되었다면 현재 개성공단은 적어도 규모가 10배 이상은 컸을 겁니다. 그리고 북한은 내부적으로 적어도 경제부분에 한해서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풍족한 상태가 되었을 테고요. 우리도 덕분에 저 한나라당의 광분하는 꼬락서니를 보지 않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하지만 봄바람 불던 시절은 2000년을 마지막으로 꼴통 부시의 등장으로 칼바람 부는 북풍한설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
아 참… 이 글의 제목이 김정일을 위한 변명이죠. 한 가지 변명을 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뒤에서 몰래 운영을 했건 국지적인 군사 분쟁을 일으켰건 간에 그래도 북한은 적어도 영변 핵시설의 동결은 꾸준히 준수해 왔습니다. 경수로 건설도 밍기적거리고 관계개선에도 늦장을 부린 미국도 중유는 꾸준히 제공해 왔고요. 최소한 판이 깨지지는 않을 만큼만 서로의 기본적인 의무를 합니다. (-.-;)
(일단 내용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후반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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