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장관급 회담과 쌀 차관
북한은 슈퍼 노트 제조와는 상관이 없다
2007년 6월 6일 서프에 올린 글
2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결국 쌀 차관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행이 어제 (6월 4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KBS 라디오에서 출연하여 “2.13 합의 초기 조치 이행이 전혀 가망이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다시 고려해 보겠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다시 희망을 가져 봅니다.
이제껏 서프에 글을 쓰면서 노통 정부가 진행한 정책에 반대를 해 본 건 이라크 파병 이외에는 없었습니다만, 이번에 한 번 더 반대를 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이 동결되고 그 대가로 중유와 경수로 건설이 제공되며 나름대로의 균형을 이루던 한반도에서, 부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주장으로 판이 깨져 버리죠. 언제 한번 부시 정권이 주장했던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상세한 비판글을 써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올해 들어서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북미 제네바 합의 틀을 뒤집어엎었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주장의 수위를 상당 수준 낮추었다는 점만 말씀 드립니다.
결국 ‘잃어버린 4년’이라는 이름의 길고 긴 줄다리기 속에서 제 4차 6자 회담에서 극적으로 북한의 핵 동결과 그에 대한 보상을 합의하게 되죠. 이게 2005년 9월 19일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한, 딴지 걸기가 시작됩니다. 마카오에 소재한 BDA를 통해 북한이 매년 5억 달러 이상의 위조 달러 유통을 포함한, 마약 밀매와 위조 담배 판매 자금의 세탁을 추진해 왔다는 주장입니다. 이 딴지의 여파로 거의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미간의 핵 협상은 교착 상태를 지속하고 있고 한반도에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도 고달픈 상태가 계속되고 있죠.
이런 상태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미국 재무부의 주장을 한번 밑바닥부터 점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5억 달러 위조 달러 제조설
이 주장의 근거는 미국의 보수적인 연구소인 해리티지 재단의 발비나 황 (Balbina Hwang) 연구원이 2005년 9월 20일자 워싱턴 타임즈를 통해 발표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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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북한 정권이 매년 2억5천만 달러 수준의 수익을 슈퍼 노트 생산을 통해서 얻고 있다는 주장이죠. 100달러짜리 슈퍼 노트의 마진율을 50%로 잡으면 결국 북한이 매년 5억 달러 규모의 슈퍼 노트를 생산 유통하고 있다는 결론이 납니다. 실제로 이 주장은 대부분의 언론과 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주장부터 따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2003년 9월 미국연방준비은행의 두 연구원인 루스 저드슨 (Ruth Judson) 과 리처드 포터 (Richard Porter) 가 ‘금융 경제 토론집 (Finance and Economics Discussion Series)’ 이라는 미국연방준비은행 이사회 (Federal Reserve Board)가 발간하는 논문집에 논문을 투고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직접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논문 전문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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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제목은 ‘위조 달러의 국제적 유통 규모 분석’ (Estimating the Worldwide Volume of Counterfeit U.S. Currency: Data and Extrapolation) 입니다.
총 7장으로 이루어진 이 논문에서 4장은 현재 미국 국내와 국제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위조 달러의 전체 규모에 대한 추정치가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매년 유통되는 위조 달러규모가 4천-5천만 달러 수준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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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들의 계산법은 아주 정교해서 현재 미연방준비은행이 검출하는 위폐 빈도를 근거로 국제 유통되고 있는 위폐의 최저 규모를 일단 1100-1300만 달러로 계산합니다. 또한 미국 재무성 비밀 검찰국 (secret service)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ederal reserve) 의 자료를 바탕으로 위폐의 최대 규모도 6천7백만-1억 8백만 달러 수준으로 산출합니다.
이 두 연구원은 이 양극단의 최저, 최대치 모두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 같지는 않고 중간 값으로 4-5천만 달러 수준을 매년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위조 달러의 규모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료가 현재까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고 종합적인 전 세계 위조 달러의 유통 규모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북한이 매년 제조해서 국제 시장에 유통시키는 슈퍼 노트가 5억 달러 규모라는 건 뭔 소리인지….(-.-;)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정식 연구원들이 실질적인 통계 자료를 근거로 판단한 전 세계 위조 달러 규모가 4-5천만 달러라고 하는데, 이 보다 10배나 많은, 북한이 제조한 5억 달러 규모의 슈퍼 노트는 다 어디로 간 겁니까?
눈썰미가 있는 서프앙들이라면 이쯤 해서 주류 언론과 학계, 그리고 미국이 BDA의 제재에 사용한 북한이 매년 5억 달러 규모의 위조 달러를 제조 유통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금방 아실 겁니다.
(2) BDA를 통한 위폐 유통 및 불법 자금 세탁 혐의
2005년 9월 제 4차 6자 회담이 거의 결실을 맺기 직전 미국 재무부는 BDA가 북한이 제조한 위조 달러의 유통과 각종 불법 자금의 세탁을 돕고 있다며, ‘돈세탁 우려 은행’으로 지정합니다. 이에 마카오 당국은 국제적인 회계 법인인 언스트 앤드 영 (Ernst & Young) 에게 BDA의 회계 감사를 의뢰합니다. 회계 감사에 착수한지 3개월만인 2005년 12월 언스트 앤드 영은 123 쪽에 달하는 회계 보고서를 완성합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인터넷에서 아주 쉽게 구할 수가 있습니다. 언스트 앤 영 보고서 전문 ☜
이 보고서에 보시면 BDA가 북한쪽 은행이나 기업들로부터 받은 현찰은 전액은 아니지만 대부분 미국계 은행인 HSBC를 통해서 유통 시켰다고 나옵니다. HSBC 홍콩 지점은 이 달러를 전부 슈퍼 노트를 잡아 낼 수 있는 판독기를 통해 검색한 뒤 국제 시장에 유통 시키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면 위조 달러를 비밀리 국제 시장에 유통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근본적으로 북한이 BDA를 통해 매년 수억 달러 규모의 위조 달러를 유통 시켰다는 미국 재무부의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다는 걸 아주 쉽게 판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언스트 앤 영 보고서에 아주 확정적인 표현을 씁니다. ‘apparent: 분명한, 명확한’ 이란 표현으로 BDA가 위조 달러를 유통하는데 관여하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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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회계법인이 ‘apparent’라는 표현을 이용해서 보고서에 위조 달러 유통이 BDA와 상관이 없다고 언급했으면 게임은 끝난 겁니다. 왜 올해 들어서 미 재무부가 더 이상 BDA과 관련해서 위조 달러 얘기를 꺼내지 않는지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거기에 덧붙여 북한의 불법 자금 세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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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전제는 달았지만, 불법 자금 세탁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발표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BDA의 사무처리들이 규정에 맞춰 처리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의심은 가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정도가 될 겁니다. 물론 이에 대한 BDA측의 반론이 있지만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죠.
불법 자금 세탁 혐의도 확실치 않고, 더군다나 위조 달러 유통 혐의에 대해서는 ‘apparent: 명백한’이란 표현까지 사용해서 부정을 했다면, 미 재무부가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더 이상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3)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 보고서
이미 지난 2006년 11월에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이 스위스 연방정부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보고서가 있습니다. 보고서 원문 링크 ☜
이 보고서는 앞서 말씀 드린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연구원들처럼 차분하게 각종 정황들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치밀하게 연관 관계를 조사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북한은 슈퍼 노트의 제조와는 상관이 없다’ 라는 주장입니다.
하나씩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미국이 북한을 슈퍼 노트 제조국으로 지목하기 전에는 이란과 시리아를 차례로 수퍼 노트 제조국으로 의심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 북한이 현재 자국 통화를 제조하는 기술 수준을 월등히 상회하는 고난도의 기술이 슈퍼 노트 제조에 사용되었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기기와 자재로 슈퍼 노트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심히 의심스럽다.
- 미국연방준비은행이 지난 수년간 19차례에 걸쳐 세심하게 업데이트한 내용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슈퍼 노트가 제조되었다.
- 슈퍼 노트가 극동 아시아로부터 유래한 경우는 거의 없다.
-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이 수집한 자료를 미국 비밀 검찰국에 제출하였지만, 수많은 기술적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비밀 검찰국은 관련 자료의 공개와 수사 착수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미국 같은 패권국가에 비하면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의 이번 보고서는 새 발의 피보다 못 할지 몰라도 현재 국제적으로 대부분 국가가 사용하는 조폐 제조 기기와 자재의 원산지가 스위스인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조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비중을 갖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약간 오바해서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 보고서의 행간을 읽어 보기로 하죠.
- 미국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국가들이 필요에 따라 차례대로 슈퍼 노트 제조국으로 의심받고 있는 거 아니냐? 라는 비아양
- 실제로 북한의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원판 달러보다 더 정교한 기술이 사용되는 슈퍼 노트의 제조는 실제로 불가능
- 19차례의 세심한 업데이트를 그때마다 추적할 수 있다는 얘기는 내부 정보가 없으면 택도 없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지적
- 정말 북한이 출처라면 왜 극동 아시아로부터 유래한 슈퍼 노트가 없냐
- 미국 너희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
발목을 잡힐 꺼리는 남기지는 않았지만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의 저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북한이 아니고 미국이 슈퍼 노트의 제조국이 아니냐 하는 의심의 눈초리죠.
결론
제가 준비한 내용은 다 털어 놓았습니다. 사실 저는 북한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꽤나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덕분에 국제방의 소위 북빠 양반들과 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하지만 북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적어도 슈퍼 노트 제조 혐의와 BDA를 통한 불법 자금 세탁에 관해서는 북한은 좀 억울한 면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BDA 해결이 늦춰지면서 2.13 조치 이행시한을 지키지 않는다고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처사인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북한에 제공되고 있는 인도적 차원의 식량 제공이 2.13 조치와 연계되어야 하는 당위성도 다른 이유에서 마찬가지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어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2.13 합의 초기 조치 이행이 전혀 가망이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다시 고려해 보겠다.”라고 발언을 하신 걸 보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찌되었건 이번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북한에 쌀 지원을 유보한 조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임을 밝힙니다.
사족: 이 글을 준비하며 자료를 모으면서도, 이 글을 보고 북빠 양반들이 또 ‘미제국주의자들’ 운운하며 날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그렇기는 했는데 역시나 일부 국제방 친북 경향 양반들의 댓글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요. 한반도의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미국의 공작이 정나미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반대로 눈에 뻔히 보이는 미국의 도발에 한발 정도 뒤로 물러서 여유 있게 응수하지 못하고 늘 이용만 당하는 북한의 단세포적인 반응도 지긋지긋합니다.
아무튼 일부 서프앙들께서 댓글에 주신 의견을 중심으로 제가 조금 더 속내를 열어 보이겠습니다.
올해 1월 10일에 제가 쓴 FAZ의 슈퍼노트 기사와 6자 회담 그리고 북핵 문제 ☜이란 글이 있습니다. 기사에서 슈퍼 노트의 출처가 미국 CIA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보시면 독일의 대표적인 우파지인 FAZ의 기사라 제가 좀 충격을 받았었죠.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FAZ는 북한에 우호적인 좌파 나 진보 성향의 언론사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스위스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나라입니다. 무슨 얼어 죽을 인권이나 정의감 같은 걸로 먹고 사는 나라가 아니죠.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의 보고서가 나가던 2006년 11월은 당시 미국이 북한을 위조 달러 제조 혐의로 한창 밀어 붙이고 있던 시기입니다. 이미 탄도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은 터진 상태였고요. 그런 상태에서 북한이 슈퍼 노트 제조국이 아니고 행간으로 미국 스스로의 자작극이란 냄새를 풍기는 보고서를 만든 겁니다. 더군다나 요즘 달러 제조에는 optically variable ink 라고 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잉크를 사용하는데, 이 잉크의 제조사가 SICPA라고 해서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입니다. 이 SICPA의 최대 고객이 미국연방준비은행입니다. 그런 나라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보고서를 자국의 정부 웹사이트에 올린 거죠. 과연 정의감이나 진실을 추구하는 순수함이 동기였을까요?
자~~ 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 좀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 보기로 하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FAZ의 기사가 먼저지만 실제 보고서가 나온 건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의 보고서가 먼저입니다. 내용의 강도는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의 내용이 좀 약하죠. FAZ의 기사는 CIA가 슈퍼 노트의 실제 주인공이란 내용이니 더 충격적인 것이고요.
이 보고서와 기사가 나온 시점이 각각 작년 11월과 올 1월입니다. 시차를 두고 내용의 강도가 올라가고 있죠.
미국이라고 대북정책 노선이 하나로 통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네오콘이 예전에 비해서는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아직도 입김이 강하고, 반대로 네오콘의 삽질로 4년 전 겨우 1-2발 정도의 핵탄두 밖에 에 보유하지 못하던 북한이 졸지에 10여 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한 나라로 변하고 덩달아 동북아 정세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모양새로 전개되어 가는 걸 못 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이들 양대 세력간에 피 튀기는 세력 다툼이 있는 거라고 봅니다. 저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북한의 핵 확장을 저지하고 싶은 세력이 FAZ와 스위스 국제범죄조사국에게 정보를 흘리고 네오콘을 압박할 기사나 보고서 작성을 부추겼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FAZ나 스위스 정부는 절대로 중도나 진보 성향이 아닙니다. 북한에 우호적이지는 더더욱 않고요.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하죠







